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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QnA

[까만책 (수능기출) > 탐구영역] 2025 마더텅 수능기출문제집 동아시아사

코코볼2024.08.29페이지 : 0쇄 수 : 780답변현황 : 답변완료
감사합니다. 문의하신 내용에 대해 재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259년에 맺은 강화와 1270년에 맺은 강화의 차이점에 대해서 질문하셨는데, 두 강화의 차이점은 '원이 요구하였던 조군(助軍)의 수용 여부'입니다. 해당 내용과 관련하여 발췌한 논문 내용을 아래에 작성해 두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1260년 쿠빌라이는 대칸위 정쟁을 앞두고 원종에게 고려 왕조(왕권, 영토, 백성)의 온전한 존속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1262년 말부터 쿠빌라이는 자신의 독자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고려에 ‘조군(助軍)’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고, 그것은 다시 국왕과 무신의 갈등을 야기시켜 원종이 폐위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쿠빌라이는 비록 원종의 복위를 돕고 세자 왕심(충렬왕)과 공주의 혼인을 허락했지만, 동시에 당초 약속했던 고려의 영토와 백성을 보전해 주는 조치들을 무효화시켜 최탄 등의 투항을 받아들이고 동녕부를 설치하였다. 또 홍차구와 다루가치의 정국 간여 행위로 왕권도 심각하게 위협받게 됨으로써 비록 ‘군현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고려 왕조의 완정성은 상당 정도로 훼손되었다. 1278년의 친조에서 충렬왕은 쿠빌라이에게 일본 원정에 자발적으로 ‘조군(助軍)’할 것임을 약속함으로써 몽골 군대와 다루가치, 홍차구를 고려 경내에서 몰아내었다. 1232년 무신집정자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조군(助軍)을 거부하고 천도를 단행하여 고려의 백성과 영토를 방기하였고, 1278년 충렬왕은 자신의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조군(助軍)을 이행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전자는 ‘대몽 항쟁’의 역사가 되었고, 후자는 ‘원 간섭기’의 역사가 되었다. (출처 : 13세기(1219~1278) 몽골―고려 관계 재론 - 소위 ‘륙사(六事)’ 요구와 그 이행 문제를 중심으로, 최윤정 논문) 저희의 답변이 학습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저희 마더텅 교재에 대한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근거로 보내주신 논문은 1259년과 1270년에 몽골과 강화를 맺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가 전혀 아닙니다 몽골과 강화를 맺은 시기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자료를 보여주실 수 있나요? 각종 수험서에 왜 몽골과 강화를 이 때 맺었다는 명확한 시기를 제시하지 않는 것인가요?
답변완료
2024.08.30마더텅
안녕하세요, 마더텅 사탐팀입니다.
<025 마더텅 수능기출문제집 동아시아사> 교재에 대해 문의주셔서 감사합니다.

1259년과 1270년에 고려와 몽골이 강화를 맺었음을 증명하는 자료와
각종 수험서에 명확한 시기 제시를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셨는데,
요구하신 내용은 저희 마더텅에서 관할하는 바가 아님을 안내드립니다.

고려와 몽골이 강화를 맺은 자료에 대해 문의하고 싶으시다면,
교과서 출판사에 직접 문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의 답변이 학습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저희 마더텅 교재에 대한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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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마더텅 출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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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마더텅 출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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