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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QnA

[까만책 (수능기출) > 탐구영역] 2025 마더텅 수능기출문제집 동아시아사

첵스초코2024.08.27페이지 : 0쇄 수 : 780답변현황 : 답변완료
2025 마더텅 수능기출문제집 동아시아사 해설편 84p 21번 문항 1번 선지 해설인 '몽골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하며(1232) 대항하였지만, 결국 몽골과 강화를 맺어(1270) 부마국이 되었다.'라는 문장은 잘못된 내용이 아닙니다. 1270년에 고려 정부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한 게 맞습니다. 위 해설 문장이 오류가 아님을 증명하는 내용을 수능 연계 교재와 교과서에서 발췌하여 아래에 작성해 두었으니 학습에 참고 바랍니다. 고려 정부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개경 환도를 반대한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시작하여 진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항전하였지만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 진압되었다(1273). (출처 : 2025학년도 수능특강 한국사 영역)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외면한 무신 정권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결국 무신 정권이 무너지면서 고려 정부는 강화를 추진하여 개경으로 수도를 옮겼다(개경 환도, 1270). (출처 : 금성출판사_한국사 교과서) 고려 정부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였다(1270). 한편 개경 환도를 반대한 삼별초는 진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항전하였지만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게 진압되었다(1273). (출처 : 동아출판_한국사 교과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고려 정부는 1270년에 몽골과 강화를 맺은 이후 개경으로 환도한 게 맞습니다. 따라서 해당 내용은 오류가 아닙니다. 오류가 아니라고 답변하셨는데 근거로 주장하시는 자료들은 개경 환도의 연도를 1270년이라고 한 것이지 강화의 연도를 1270년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1259년에 맺은 강화와 1270년에 맺은 강화의 차이점이 뭔가요? 1259년 8월, 몽골의 몽케 칸이 붕어하고, 몽케의 동생들인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형제 사이에서 칸위 계승 전쟁(툴루이 내전)이 벌어질 시점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몽골로 향하던 고려의 태자 왕전이 이후 새롭게 제5대 대칸이 될 쿠빌라이를 만나 강화(講和)를 논의하면서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귀국한 태자는 7월에 승하한 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다. 기나긴 전쟁이 끝났지만 고려 조정의 의견 불일치로 개경 환도(還都)만큼은 계속 지연되었다. 원종은 몽골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어 복속을 거듭 표시했으나,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권자가 된 김준의 반대로 강화도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심지어 1268년 김준을 살해하고(무진정변) 새 집권자가 된 임연은 1269년 6월 강화를 반대하여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 왕창을 임시로 즉위시키니 이 사람이 영종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몽골의 압력으로 11월에 물러났고, 임연 역시 몽골의 재침공을 두려워하다가 등창으로 죽었다. 임유무 역시 출륙을 반대했지만 몽골의 군사적인 뒷받침을 받은 원종에 의해 살해되면서(경오정변) 12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100년 만에 무신정권은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강화를 맺은 지 10년 만에 개경으로 환도했다.
답변완료
2024.08.28마더텅

안녕하세요, 마더텅 사탐팀입니다.
<2025 마더텅 수능기출문제집 동아시아사> 교재에 대해 문의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의하신 내용에 대해 재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259년에 맺은 강화와 1270년에 맺은 강화의 차이점에 대해서 질문하셨는데,
두 강화의 차이점은 '원이 요구하였던 조군(助軍)의 수용 여부'입니다.

해당 내용과 관련하여 발췌한 논문 내용을 아래에 작성해 두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1260년 쿠빌라이는 대칸위 정쟁을 앞두고 원종에게 고려 왕조(왕권, 영토, 백성)의 온전한 존속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1262년 말부터 쿠빌라이는 자신의 독자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고려에 ‘조군(助軍)’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고, 그것은 다시 국왕과 무신의 갈등을 야기시켜 원종이 폐위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쿠빌라이는 비록 원종의 복위를 돕고 세자 왕심(충렬왕)과 공주의 혼인을 허락했지만, 동시에 당초 약속했던 고려의 영토와 백성을 보전해 주는 조치들을 무효화시켜 최탄 등의 투항을 받아들이고 동녕부를 설치하였다.
또 홍차구와 다루가치의 정국 간여 행위로 왕권도 심각하게 위협받게 됨으로써 비록 ‘군현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고려 왕조의 완정성은 상당 정도로 훼손되었다.
1278년의 친조에서 충렬왕은 쿠빌라이에게 일본 원정에 자발적으로 ‘조군(助軍)’할 것임을 약속함으로써 몽골 군대와 다루가치, 홍차구를 고려 경내에서 몰아내었다.
1232년 무신집정자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조군(助軍)을 거부하고 천도를 단행하여 고려의 백성과 영토를 방기하였고, 1278년 충렬왕은 자신의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조군(助軍)을 이행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전자는 ‘대몽 항쟁’의 역사가 되었고, 후자는 ‘원 간섭기’의 역사가 되었다.
(출처 : 13세기(1219~1278) 몽골―고려 관계 재론 - 소위 ‘륙사(六事)’ 요구와 그 이행 문제를 중심으로, 최윤정 논문)

저희의 답변이 학습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저희 마더텅 교재에 대한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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